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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뇌 강화)

지리의 힘 2 : 팀 마샬(5-3)

그리스와 터키를 통해 본 지리의 힘...

뉴스를 통해 본 글로벌 이슈는 짤막한 하나의 우연히 발생한 하나의 사건으로 인지되었었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서 나라별 역사와 상황들을 보니 우연히 발생한 이슈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경제적 자유를 향한 나의 투자 여정에 좋은 등불이 될 것 같다.

그리스
터 키

□ 그리스 : 그 위치 때문에 고대부터 현재까지 열강들의 게임의 대상이 되다

  • 투키디데스는 서구 정치철학의 규범을 세운 인물이다. 그가 쓴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오랜 세월에 걸쳐 국제 관계학을 연구하는 이들에게 영감의 원천이나 다름없었다. 일례로 《투키디데스의 함정》은 새로운 강대국이 부상하면 기존의 강대국이 이를 견제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전쟁이 발발한다는 뜻이다.
  • 현대의 아테네는 6천 개가 넘는 섬들을 품고 있는 이 나라의 수도다. 그리스의 어느 곳도 바다에서 100킬로미터 이상 떨어져 있지 않다. 발칸 반도의 남동쪽 끝에 자리잡고 있는 이 나라는 북쪽으로는 알바니아, 북마케도니아, 불가리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으며, 북동쪽으로는 터키와 접하고 있다. 국경 길이는 총 1,180킬로미터에 이르지만 대부분의 국경은 해안선이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본토는 에게해, 지중해, 이오니아해에 둘러싸여있다.
  • 아테네라는 도시국가는 고대 그리스와 동의어가 된 곳이다. 아테네는 현재 아크로폴리스(높은 도시라는 뜻)가 서있는 고지대에서 시작됐다. 고지대, 바다로의 접근성, 그리고 해상 패권을 쥐겠다는 결의로 스파르타 같은 비슷한 도시국가에 비해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기원전 480년 페르시아의 대규모 병력이 공격하여 왔으며 이때 테르모필레 전투가 벌어진다. 스파르타 레오니다스 왕이 지휘하는 그리스 연합군이 전진을 막기 위해 길목을 차단하나 목동이 다니는 다른 길을 찾으면서 패하게 된다. 이는 영화 300으로도 제작되었다. 그리고 결말은 페르시아의 그리스 점령이었다. 
  • 이후 30년이나 끌었던 아테네와 스파르타 간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나라를 피폐하게 만들었으며, 기원전 299년 로마가 쳐들오면서 고대 그리스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된다. 하지만, 그리스는 도시계획의 아버지라 할 히포다무스, 위대한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 의학자 히포크라테스, 수학자 피타고라스, 그리고 세계 최초의 여성 수학자 히파티아 등을 있으며, 민주주의, 곡예사, 풍자 등 그리스어에서 파생된 영어단어들만 15만개에 이른다.
  • 대다수 서유럽 국가는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이어진 제1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그런데 그리스에게 그 시기는 1912년부터 1922년까지라고 하는게 정확할 것 같다. 1912년 제1차 발칸 전쟁이 발발하였고 그리스는 테살로니키를 차지하지만 요르요스 국왕이 퍼레이드 도중 사망한다. 1913년 제2차 발칸 전쟁이 개시되었다. 이 두번의 전쟁으로 그리스는 9천 5백여명의 병력을 잃었지만 영토 면에서는 70%를 늘렸고 인구도 2백만명에서 480만명으로 늘었다. 
  • 이후 그리스는 내전을 지속적으로 겪게 되었고 1974년이 되어서야 민주주의가 다시 찾아올 수 있었다. 1981년 그리스는 나중에 EU가 되는 EEC에 가입했다.이는 그리스 경제에 보탬이 되었다. 그리고 금세기 초반 10년 동안 이룬 탄탄한 경제성장과 2004년 성공적인 올림픽 유치로 그리스 경제의 구조적인 균열은 미봉책으로 가려진채 유지되었다. 하지만, 2008년과 2009년의 재정 위기에도 정부는 잇달아 차관을 들여와 연막을 피우고 유로화 도입과정에 회계장부를 조작하는 등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
  • 그리스의 국토 방위는 본토 방어와 에게해의 지배권에 집중돼 있다. 해상을 장악하지 못한다면 본토로 가는 보급로는 단절되고 적의 침공에 훤히 노출된다. 그리하여 방어력은 에게해, 특히 로도스와 크레타섬 그리고 좀 더 동쪽인 지중해의 섬나라 사이프러스로 집중된다. 사이프러스는 전략적 지정학이라는 고속도로의 중간쯤에 자리잡고 있으며, 이곳은 동부 지중해의 주요 항로인데 최근에는 천연 가스전까지 잇따라 발견되면서 터키 사이에 새로운 갈등의 불씨가 되었다.
  • 그리스는 더 이상 영국, 러시아 또는 미국의 것일 필요가 없다. 그리스는 그리스다. 그런데도 또다시 외부 세력에게 이 나라는 중요한 부동산이 되었다. 위기 상황에 처한 러시아 해군이 흑해에서 탈출해야 할때 그리스는 2차 방어진지가 될 수 있다. 또한 그리스는 유럽의 난민 위기 최전선에 있는 데다 동부 지중해에에서 나오는 가스 파이프라인의 핵심경로가 될 운명으로 보인다.

 

□ 터 키 : 목 좋은 곳에 자리 잡았지만 친구는 별로 없다

  • 튀르키예는 터키 사람들의 땅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원래 터키인들은 아주 아주 먼 곳, 그러니까 몽골에 있는 알타이 산맥 동쪽에서 왔다. 그리고 현재 모국이 되는 곳으로 와서 확실하게 터키라 부르게 되었다. 먼저 드넓은 아나톨리아 고원을 건너야 했다. 터키의 서쪽 끝단에 있지만 현재는 이 나라의 핵심이 된 지역이다. 북서쪽으로는 마르마라해와 접해 있고 동쪽과 서쪽 해안지대에는 저지대가 펼쳐져 있다. 
  • 터키의 서쪽에서 동쪽까지는 1천6백킬로미터에 이르며 북쪽에서 남쪽까지는 5백에서 8백 킬로미터 정도다. 또 국토의 약 97%는 아시아에 속해 있고 그 가운데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아나톨리아 고원이다. 터키는 그리스, 불가리아,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이란, 이라크, 시리아 등 8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 1200년대 후반에 아나톨리아 북서부 지역에 건설된 여러 토후국 가운데 오스만 가지, 즉 <전사 오스만>이라고 불린 자가 세운 나라가 이었다. 그는 흑해 연안을 따라 비잔티움 영토를 침범해 중앙 아나톨리아까지 밀고 들어가면서 자신의 영역을 확장했다. 그 설립자를 기념하는 뜻에서 사람들은 오스만리, 즉 <오스만을 따르는 사람들>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이것이 훗날 서유럽에서 오스만 제국이 되었다.
  • 1500년대에 이르자 오스만은 발칸 지역 대부분을 장악했고 비엔나가 있는 북서쪽까지 내리 진출하더니 현재의 헝가리까지 손에 넣었다. 또 북쪽으로는 흑해를 호령했고, 남쪽과 동쪽으로는 오늘날의 시리아,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 알제리에 이르는 지역까지 지배했다. 오스만 제국의 통치자들에게 이 시대는 로마제국에 비견할 만큼 빛나는 시절이었다. 하지만 최전성기를 찍고 나서 1683년에 비엔나 초입에서 합스부르크 제국에게 패배를 당한 이후 그들은 제국의 붕괴로 가는, 길지만 확실한 몰락의 길을 밟기 시작한다.
  • 점점 산업화를 이뤄가는 서유럽 국가들이 부상하는 데 반해 오스만 제국은 기술적으로나 군사적으로 그들과 겨룰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됐다. 서유럽 강대국 가운데 특히 영국과 프랑스는 오스만을 중동에서 밀어내기 시작했다. 1912년부터 1913년까지 이어진 발칸 전쟁에서 콘스탄티노플이 불가리아에 거의 함락될 지경에 이르렀을 때 이 <유럽의 병자>가 얼마나 병들어 있는지가 자명해졌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에서 잘못된 편을 선택했을 때 그들 자신의 사망 확인서(로잔조약)에 서명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1918년 휴전 협정에 따라 제국의 수도는 영국, 이탈리아, 프랑스군에 점령당했고, 결국 1922년 오스만 제국은 해체되었으며 술탄체제는 폐지됐다.
  • 아타튀르크는 1923년 창건한 신생 터키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다. 앙카라가 수도로 선택되었고 콘스탄티노플은 이스탄불로 바뀌었다. 그는 현대화는 곧 서구화라는 결론하에 일련의 급진적이 개혁을 단행했다. 종교와 정치의 분리를 포함한 과거와의 단절을 상징하는 의미심장한 조치들이었다. 하지만 1929년 미국의 증시 폭락으로 시작된 대공황으로 경제위기가 촉발되고 제2차 세계대전으로 힘든 여정을 겪는다.
  •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이 새 지도자는 종교적 민족주의와 신오스만주의의 화신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이다. 2002년 선거에서 승리했고 에르도안은 그 이듬해에 총리가 되어 등장한다. 10년 동안 터키는 이웃들과 절대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정책 기조아래 서방 강대국들과 친한 사이를 유지하는 동시에 무역과 소프트파워, 외교력을 이용해서 발칸지역과 중동에 서서히 영향력을 확대해 나가는 10년을 보냈다. 부드럽고도 부드러운 접근법은 하지만 점점 약해지고 있었고 2011년 아랍의 봉기가 촉발되자 전과 다른 태도를 취하였다. <이웃과 문제가 없는> 정책은 이제는 <친구가 없는>쪽에 더 가까워졌다. 이스라엘 간의 사이가 틀어지고, 무슬림현제단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 이집트와 틀어지는 등 결과적으로 이웃 나라들과 끊이없이 충돌하게 된다.
  • 2000년대에 일부 유럽 국가 지도자들이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을 부인하는 터키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다. 이는 에르도안의 정권이 EU와 나토로부터 멀어져서 독자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이유가 되었다. 동시에 터키 군부 내에서 마비 바탄, 즉 <푸른 조국>이라는 개념을 지지하는 이들이 등장했다. 이들은 그리스가 동조하는 미국의 책략의 도구가 되는 것은 터키가 이 세계에서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로 올라서는 것을 막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이 관념에는 자신들을 둘러싼 주변 3개 바다인 흑해, 에게해, 동부 지중해를 지배할 것이라는 세계관이 담겨 있다. 이 생각을 공공연하게 언급하는 이면에는 오스만 제국이 영토를 잃고 오늘날의 터키로 쪼그라들게 만든 로잔조약을 파기하려는 장기적인 전략이 깔려 있다. 그리고 이 개념을 대중화한 사람은 전직 해군 소장 쳄 구르데니즈였다. 이 개념은 쉽게 말하면 에게해와 동부 지중해에서 터키 정부의 정책, 특히 대 그리스 정책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으며 이는 해저가스전 발견과 연계된다.
  • 인접한 이웃나라들과 터키 정부와의 관계는 터키가 국내에서 직면하고 있는 두 개의 중요한 이슈들의 영향을 받는다. 바로 아나톨리아의 발전과 쿠르드족과의 끝나지 않는 전쟁이다. 결과적으로 이웃 나라와는 물전쟁(수력발전), 국내에서는 쿠르드족과의 전쟁을 겪고 있다. 또한 외교전선에서 터키는 점점 더 고립으로 치닫고 있으며 신뢰 또한 잃어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 오스만 제국이 한계에 이르렀음을 알았던 아타튀르크 초대 터키 대통령은 서구화에 중심을 맞추면서 터키를 20세기로 끌어들였다. 반면 에르도안의 터키는 지난 10년간 수평선을 360도 골고루 둘러본 뒤 보다 남쪽과 동쪽을 향해 천천히 초점을 움직여 가고 있다. 현재도 이 여정은 그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앞으로 선거를 통해 변화할 가능성도 내재되 있는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