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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뇌 강화)

지리의 힘 2 : 팀 마샬(5-2)

사우디아라비아와 영국을 통해 본 지리의 힘...

세상은 변하고 있지만 지리는 변하지 않았다. 그 위치에 그대로 있으면서 그 위에 있는 세상이 시간이 지날수록 다양한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때론 좋은 일도 있지만 대부분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갈등과 이슈를 일으키고 있다. 그런 상황아래에서 나는 어떤 이익을 위해 노력해야할까?

사우디아라비아
영 국

□ 사우디아라비아 : 한 가문의 성이 나라 이름이 되다

  • 1740년 중앙 아라비아 네지드의 일부 지역은 무함마드 이븐 사우드라는 토호의 통치를 받고 있었다. 그러다가 1930년대에 이르러 그의 직계 후손 가운데 하나가 영토를 넓힌 뒤 사우디아라비아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는 한 가문의 이름을 붙여 나라를 세운 것으로 그 가문이 아닌 사람들에게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할 것이다. 특히 페르시아만을 마주하는 지역에 거주하는 시아파 주민들은 말이다. 이 말은 그 표면 아래 흐르는 긴장감을 보여주는 것이다. 통치하는 왕가가 권력을 유지하려면 중심이 외곽을 품어야 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 사우디아라비아는 1744년에 종교학자인 무함마드 이븐 압둘 와하브가 무함마드 이븐 사우드에게 바야, 즉 충성 맹세를 했다. 와하브는 무슬림이면 군말 없이 지도자에게 충성해야 하며, 대신 지도자는 엄격한 이슬람 율법에 따라 통치해야 한다는 신념을 지니고 있었다. 이런 양측의 합의에는 사우드 가문은 정치를, 종교적 측면은 와하비파의 영역이라는 입장이 담겨 있었다. 
  • 이븐 사우드는 무력으로 사우디아라비아를 통합하였고 이 통합을 공고히 하려고 자신이 굴복시킨 부족과 고위 성직자 가문의 딸들과 결혼했다. 그리하여 20명이나 되는 아내를 거느리게 되었는데 사실 이슬람 종교법에 따르더라도 4명을 넘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이 혼인들의 결과는 100여 명이 넘는 자손들과 나라를 통치하는 <가족 네트워크>를 탄생시켰다.
  • 1932년 이전 수십 년 동안 이란, 바레인, 이라크 등지에서 유전들이 속속 발견되었고, 사우디아라비아 역시 유전이 발견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븐 사우드는 영국은 식민주의 성향을 버리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를 가지고 있었고, 1933년 미국의 스탠더드 오일 컴퍼니 오브 캘리포니아(SOCAL)에게 계약을 주었다. 1935년 시추가 시작되었고 38년에 석유가 나왔다. 초기에는 수익이 SOCAL에 갔지만 해가 갈수록 지분을 획득하여 지금의 아람코(사우디아라비아의 국영 석유 기업)가 되었다.
  • 1965년 개시된 텔레비전 방송이 종교적 극단주의로 내모는 단초가 되었고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은 사우디아라비아의 현대를 저지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학교와 대학은 와하비즘만이 진정한 이슬람이라고 젊은이에게 가르쳤고 이를 위해 군사기술 연마 및 이를 사용하기를 희망하였다. 그들 가운데 오사마 빈 라덴이 있었고 2001년 9월 11일 19명의 9·11 테러 주동자들은 미국을 공격하여 전쟁을 일으키게 된다. 이 19명 중 15명이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이며 그 배후인 빈 라덴 역시 사우디아라비아출신이었다. 당국은 과격주의자들을 막으려다 알카에다의 부상이라는 부작용이 야기된 것을 은근히 깨닫지만 이와 선을 긋기 위해 노력하였다.
  • 이제 사우디아라비아는 중동의 패권을 위한 31세 젊은 왕세자의 행보에 주목하고 있다. 2017년 살만 국왕은 31세 된 아들인 모하메드 빈 살만(MBS)을 왕세자로 지명하였다. 이 나라의 왕가에는 대략 1만 5천명의 구성원들이 있으며 2천 명 정도되는 원로 그룹이 부와 권력을 쥐고 있다. 그 만큼 그의 기반을 취약하였다.
  • 이를 해결하기 위해 빈 살만은 리츠 칼튼 호텔에 열한 명의 왕자들과 경찰, 군대, 경제계의 고위 엘리트 수십 명을 호텔에 감금했다. 그 가운데는 국가방위부의 수장이자 왕세자의 사촌인 미텝 빈 압둘라 왕자도 있었다. 이는 일종의 숙청 작전이었던 것이다. 이런 폭정과 더불어 왕세자는 진정한 개혁가이기도 하다. 그의 주변에는 젊은 조언자들이 포진해 있는데 그들은 변화에 훨씬 개방적이다. 그 결과 여성에게 운전을 허용했고, 영화관을 다시 열었으며, 종교적 판결도 현대식으로 손 보고, 경제 구조도 뜯어고치려 하고 있다. 이런 시책은 그가 페미니스트이자 열렬한 예술 애호가이며, 종교적으로는 자유주의자이며, 경제적으로는 시장경제의 신봉자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 또한 비전 2030을 추진하고 있다. 기술과 서비스 분야에 중점을 두고 경제의 다변화를 추구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석유에서 탈피해 산업을 다각화하는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석유에서 얻는 수입으로 지불하는 보조금을 급격하게 철회해서 국민들이 경제적으로 곤란을 겪지 않게 하면서도 나라의 장부를 맞추는게 관건이다.

 

□ 영국 : 지리에서 파생된 분리의 정서가 남아 있다

  • 브리튼은 섬들이 모여 만들어진 섬나라다. 그 크기를 기준으로 만조 때 수면 위로 나오는 섬들만 세어도 수천 개는 될 것이다. 하지만 이 가운데 사람이 살고 있는 섬은 2백여 개에 불과하다. 인구는 잉글랜드 5천6백만 명, 스코틀랜드는 550만명, 웨일스는 3백만, 북아일랜드는 2백만 명을 밑돈다. 
  • 그 시작은 서기 43년 로마의 점령부터가 적당할 것이다. 로마는 루드게이트 힐과 콘힐 위 단 두 군데에만 도시를 건설했다. 이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 론디니움, 즉 런던이다. 최초의 런던 브릿지를 건설한 사람도 로마인이다. 그로부터 3백년 뒤 로마 군단은 서둘러 제국의 수호를 위해 떠나고 이내 파벌들의 싸움터로 전락하였다. 
  • 이후 헨리 8세가 잉글랜드를 통치하였고 1533년 캐서린과 이혼하고 앤 불린과 결혼한 그는 엘리자베스라는 딸을 낳았으며 앤 불린과의 결혼으로 가톨릭 교회로부터 파문당한 그는 종교개혁에 손을 댄다. 그리하여 영국 국교회를 창설하고 기존의 수도원 800여개를 폐쇄하면서 그에 부속된 토지와 재산을 왕의 것으로 선언했다. 엘리자베스 1세는 스코틀랜드와 유럽 본토 가톨릭 열강들의 많은 음모와 반발 소에서도 잉글랜드를 더욱 더 굳건하게 프로테스탄트 왕국으로 이끌었다. 심지어 1587년에는 반역을 도모했다는 죄를 물어 사촌인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를 처형하기까지 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잉글랜드를 부흥으로 이끈 군주였다. 그 이후 1707년 잉글랜드와 웨일스는 스코틀랜드와 통합을 이루고 이것은 양쪽 모두를 위협하는 지리가 변하면서 서로 윈윈할 수 있게 되었다.
  • 잉글랜드는 유럽에서 패권국이 출현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늘 힘의 균형을 추구해 왔다. 이른바 역외균형 전략(강대한 세력이 아닌 세력을 지원하여 두 세력 간의 긴장을 키워 반대편에서 안전을 확보하는 전략)을 펼치는 것은 섬 전체를 확실하게 통제하겠다는 의지이다. 반면에 스코틀랜드는 프랑스와의 올드 동맹을 통해 잉글랜드를 견제하였다. 하지만, 1707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연합법을 통과시키면서 역사상 처음으로 단일 정부를 구성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영국은 외부로 향할 수 있게 되었다. 
  • 영국의 참나무는 매우 단단해서 적이 대포를 발사해도 견뎌내고 이전의 대형 선박은 엄두도 못 내었던 멀고도 낯선 신세계를 탐험할 때 좌초할 위험도 없는 선박을 제조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강력한 해군력을 갖추었다. 결과적으로 이는 해상패권을 가질 수 있었다. 1801년 아일랜드가 연합법에 따라 공식적으로 영국의 일원이 되면서 완벽한 모습을 갖추게 되었으며 해가 지지 않는 다는 대영제국으로 성장하였다.
  • 하지만, 영국은 2차 세계대전을 통해 전투에 사용할 함선 등을 얻는 대가로 해군기지 대다수를 미국에 넘겨주었고 이는 힘의 균형추는 미국으로 넘어감은 물론 대영제국를 지속할 능력은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그 결과 한쪽발은 미국에 한쪽발은 EU에 걸치며 본인들의 역할을 찾아야 했다.
  • 현재 영국은 경제, 정치, 군사적인 면에서 차상위 세력으로 남아 있다. 영국은 유엔 상임이사 5개국 가운데 하나이며 나토를 대표하는 고참 회원국이자 G7과 영연방의 일원으로서 자리를 지키고 있다. 런던은 세계의 금융을 이끄는 도시다.런던은 여전히 소프트파워의 리더로 남아 있는 이 나라의 수도로 대단히 역동적인 문화를 생산하면서 전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또한 5억 명 이상의 사람들이 모국어로 10억명의 사람들이 제 2언어로 사용하고 있는 영어를 가지고 있다. 영어는 여전히 통상과 국제 계약에서 주요 언어로 사용되고 있다.